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 워싱턴 (문단 편집) == 평가 == >전쟁 속에서도 으뜸, 평화 속에서도 으뜸, 그의 국민들 마음 속에서도 으뜸이었던 사람 >(First in war, first in peace, and first in the hearts of his countrymen) >---- >헨리 리 3세(Henry Lee Ⅲ), 조지 워싱턴의 장례식에서의 추도 연설 >按, 華盛頓, 異人也. 起事勇於[[진승|勝]][[오광|廣]], 割據雄於[[조조|曹]][[유비|劉]], 旣已提三尺劍, 開疆萬里, 乃不僭位號, 不傳子孫, 以創爲推擧之法. 幾於天下爲公, 駸駸乎三代之遺意. 其治國崇讓善俗, 不尙武功, 亦逈與諸國異. >余嘗見其畵像, 氣貌雄毅絶倫, 嗚呼, 可不謂人傑矣哉! [[미국|米利堅]][[합중국|合衆國]]以爲國, 幅員萬里, 不設王侯之號, 不循世及之規, 公器付之公論, 創古今未有之局, 一何奇也! 泰西古今人物, 能不以華盛頓爲稱首哉! >---- >살피건대, 화성돈(華盛頓: 워싱턴)은 이인(異人: 비범한 사람)이로다. 무기를 들고 일어난 것은 [[진승]]·[[오광(초한쟁패기)|오광]]과 같고, 천하를 분할해 웅거함은 [[조조]]·[[유비]]와 같다. 그러나 3척의 검을 들고 일어나 [[미국|만 리가 되는 영토]]를 얻었는데도, 참람되이 [[왕]]을 자칭하지 않고, [[세습|자리를 자손에게 물려주]]지도 않았으며, 외려 [[선거|추거(推擧)의 법]]을 세웠다. 이는 천하위공(天下爲公: 천하를 사유물이 아닌 공적인 것으로 여김)[* [[자치통감]]에 나오는 말이다.]에 따른 것이니, 3대에 남길 뜻을 널리 떨쳤도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선량한 풍속을 숭상하고 [[전쟁|무력]]을 높이지 않았으니, 이 또한 다른 나라들을 둘러보아도 같지 않다. >내 그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기골과 용모가 굳건하고 빼어났으니, 이야, 인걸이라 아니 부를 수 있겠는가! [[미국|미리견(米利堅)]]은 [[합중국]]의 도로써 나라를 세우니, 만 리나 되는 영토를 아우르지만, [[왕후#s-2|왕후(王侯)]]의 칭호를 세우지 않고, 세습의 법규도 따르지 않으며, [[민주주의|나라의 일을 공론에 따라 처리]]하여, [[대통령제|고금에 없던 형국]]을 만들어내었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고금의 [[서양|태서(泰西)]] 인물을 통틀어, 어찌 화성돈이 으뜸간다 하지 않을 수 있으랴! >---- >서계여(徐繼畬: 1795~1873)[* [[청나라]] 말기의 경세 사상가로 서구의 근대 민주주의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유교 문화권에서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오르지 못할 왕좌는 감히 쳐다보지도 않는 게]] 미덕이었다. 설령 군주로 추대받는 것이 당연한 상황에서도 '나는 관심(혹은 능력)이 없지만 여러분들이 그렇게 밀어붙인다면 별 수 없이…' 소리는 빼먹지 않는 게 이 때문이다. 그래서 왕이 되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워싱턴이 대통령을 4년+4년만 하고 쿨하게 손을 떼버렸다는 얘기를 들은 근대 유학자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모양.], 《영환지략(瀛環志略)》[* 서계여의 지인들은 이 글을 새긴 비문을 미국에 보냈고, 당시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이에 대한 답례로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를 서계여에게 선물했다. 이 비문은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tone_in_the_Washington_Monument_from_Ningbo_China.jpg|워싱턴 기념탑에 있다]].] >그렇게 마무리짓고 끝낸다면, 그가 이전에 무엇을 해왔는지와, 이 사이의 관계를 볼때, 그를 살아있는 그 누구보다도 특별한 인간으로 만들 것이며, 그가 우리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으로 여겨지게 할 것이다. >(That act closing and finishing what had gone before and viewed in connection with it, placed him in a light the most distinguished of any man living, and that he thought him the greatest character of the age.) >---- >[[조지 3세]], 영국 국왕[* [[7년 전쟁]] 문서에도 소개되어 있는 펜실베이니아 출신 궁정 화가 벤저민 웨스트에게 미국이 독립을 이룬 이후에 워싱턴이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었고, 웨스트는 이에 그는 자기 농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대해 위와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8년의 임기를 원만하게 보냈고[* 이후에 [[존 애덤스|애덤스]] [[존 퀸시 애덤스|부자]]를 제외하고 7대 [[앤드루 잭슨]]까지는 모두 8년 임기를 원만하게 보냈다. 다만 그 이후로는 8년 임기를 원만하게 보낸 대통령은 18대 [[율리시스 S. 그랜트]], 34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44대 [[버락 오바마]] 이 3명 뿐이다. 자세한 것은 [[율리시스 S. 그랜트]] 기타 문단으로.] 220년이 훨씬 넘은 현재까지도 미국 정치에서 지켜지고 있는 평화로운 [[정권교체]](Peaceful Transition)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며 이를 미국의 '''정치적 전통'''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지금도 많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미국이 건국 이래 [[독재자]]나 [[쿠데타]] 없이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펼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람의 공이 매우 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셈이며,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대통령제]]를 도입한 나라에는 그의 잔향이 짙게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법이나 약속이 아닌 [[로버트 월폴]]의 행보 자체가 [[총리]]라는 직책이 되었듯, 대통령이라는 직책 역시 한낱 법률 사항이 아니라 조지 워싱턴의 영웅적인 행보 자체가 대통령직의 규범이 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대통령이 어떤 직책인지 역사에 등장시킨 인물'''이다. 이 점이 링컨과 함께 워싱턴이 미국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 자리에서 변동이 없는 이유다.[* 링컨이 분열된 조국을 하나로 만들어 주들의 연합이 아닌 연방으로 만들고 흑인 인권에 대한 명시적 한계를 해제하며 세계 최강대국으로 거듭날 미국의 근본을 설계했다면, 워싱턴은 미국을 독립시킨 총사령관이었고 당연히 왕이 있는게 정상인 세계에서 군부의 지지까지 받았으면서도 왕의 불필요성을 보여주며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이상적으로 수행하여 민주주의를 역사에 등장시켰다. 이는 사실상 현대 미국의 핵심을 세우고 다진 두 대통령의 평가가 내려가지 않는 절대적인 이유들이다.] 이 전통이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민주주의와 선출직 지도자 제도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나라들의 경우 대통령 제도 자체가 처음부터 어그러진 경우가 많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장 한국만 봐도 [[사사오입 개헌]]이나 [[3.15 부정선거]] 등으로 미국과 달리 첫 방향성이 어그러지니 권력을 잡기 위해선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정신이 우세해져 [[5·16 군사정변]], [[유신 헌법]], [[12·12 군사반란]] 등의 사건으로 인해 나라가 오랜 기간 계속 삐그덕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한국은 끊임없는 민주화 운동과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독재국가로 남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고, 미국과 같은 좋은 선례를 얻지 못한 나머지 많은 대통령제 국가들은 독재를 향해 달려가게 되기에 정치학적으로 대통령제는 미국 등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한 제도이며 일반적으로는 실패 확률이 높은 제도라고 평하는 학자도 있을 정도다.] 이렇게 권력을 깔끔하게 포기한 조지 워싱턴의 행적 때문인지, 민주주의 국가와 민주주의를 좋게 보는 사람들은 이런 조지 워싱턴을 좋게 표현한다. 반대로, 독재 국가나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조지 워싱턴이 권력을 포기한 행적을 별거 아닌 것처럼 표현하거나 아예 무책임한 것으로 표현한다. 한편, 당시 미국 남부의 웬만한 대지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워싱턴 본인 역시 농장을 경영하면서 [[노예]]를 거느렸다. 워싱턴은 자신의 보금자리 마운트 버넌에 결혼 당시 기준 50여 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사망 직전에는 이 숫자가 300여 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자신이 운영했던 농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노예 수도 점점 더 늘어난 것이다. 게다가 워싱턴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으로 마운트 버넌을 찾는 이들도 많았기에 이를 수발할 인력도 필요해 워싱턴이 사망할 때까지 이들은 단지 잡일만이 아니라 대장장이나 천을 짜는 일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했다. 젊은 시절만 하더라도 노예제에 대한 워싱턴의 견해는 다른 농장주들의 견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으나[* 그래서 워싱턴에게 충성하는 노예들도 많았지만 반항하거나 도망가는 노예들도 있었다.] [[미국 독립 전쟁|독립 전쟁]]을 치른 이후 노예제에 대해 점차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허나 노예제 문제가 기껏 하나로 모은 미국을 [[남북전쟁|분열시킬 수 있는]] [[시한폭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워싱턴은 공식 자리에서는 노예제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본인의 [[유언장]]에는 독립전쟁 때부터 자신을 수발한 비서 [[흑인]]을 자신의 사후에 [[자유인]]으로 풀어주도록 했으며, 자기 집에 있는 나머지 노예들은 부인 마사가 사망한 후[* 워싱턴 사후 모든 노예를 풀어주면 자기가 물려받을 유산이 줄어든다고 생각한 아내의 반발이 있었다. 또 워싱턴 가의 노예는 워싱턴 외 부인 마사 소유인 노예도 있었는데, 이럴 경우 워싱턴 노예만 풀어주면 마사측 노예와 결혼한 노예 가족들은 생이별을 해야 될 판국이라 유보한 것도 있었다.] 모두 자유인으로 풀어 주도록 하였다. 워싱턴 본인은 죽을 때까지 노예를 소유했기에, 2020년 [[BLM]] 시위가 한창일 땐 워싱턴의 동상이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0070114105253073|페인트 테러]]를 당하거나 스프레이로 [[https://www.yna.co.kr/view/AKR20200616014700009|노예 소유주, 백악관을 불태워라]] 등의 메세지가 적히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은 백악관 공무원들에 의해 주의를 받고 훈방 조치된 뒤, 동상은 백악관 공무원들이 다시 원래대로 복원시켰다. 미국 건국 초기 지도자들은 노예제에 비판적인 경우가 많았는데, 그럼에도 이미 존재하던 노예제에 대한 현실적 제약이 있다보니 노예 제도의 존폐를 헌법에 명시하면 [[남북전쟁|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북부와 찬성하는 남부의 연합이 균열되어 연방이 와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개별 주에 찬반 여부를 맡기는 일종의 방임 정책을 썼다.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제퍼슨]], [[제임스 매디슨|매디슨]]의 경우 이렇게 비노예주를 늘려가다보면 노예제 허용주들도 자연스레 이를 폐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남부에서 면화 농업이 번성하기 전까지는 얼추 맞았으나, 면화 농업이 번성하자 노예제는 오히려 강화된다.] 당시의 노예제 인식은 그나마 좋게 봐서 "필요악" 수준 정도였는데, 문제는 이게 시간이 지나면서 [[인종주의|이상한 이론들]]이 나오더니[* 예를 들어 노예제가 자본주의의 빈부격차에 의한 갈등을 완화시킨다(노예니까 가난해도 문제없음)/서로 다른 두 인종이 공존할 수 있음(노예에겐 권리가 없으니까)/노예노동은 국익에 유익함/노예제는 적극적 선(positive good이다) 등등… 물론 인권 관점, 실질적인 관점에서도 맞는 소리는 없었다. 이런식의 괴상한 논리는 이전부터 있어서 약 반세기에서 한세기 전 사람인 [[윌리엄 스넬그레이브]]는 노예제가 전쟁 포로의 목숨을 구할 수 있고(전쟁포로를 죽이는 대신 부려먹던 게 노예제의 시초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수천년 전이었다면'.) 팔려간 노예는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며 주인은 그들을 돌보는 데 큰 관심을 쏟으며 연체자의 노예화를 허용하여 상인들에게 이익을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런 식으로 노예제 옹호론자들의 논리는 훗날 거꾸로 노예제 폐지론자의 논리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심지어 정당화되고 이념화되었다는 것.[* 노예제도를 사수하기 위해 종교를 악용하기도 했는데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는 핀이 친구인 흑인 노예가 도망친 것을 알고 고민에 빠지는데 그 이유가 뭔고하니 도망가는 노예를 고발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핀은 모범생보다는 부랑아에 가까움에도 지옥에 떨어질 각오를 해야 도망치는 노예를 도울 마음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이니 얼마나 종교를 악용했는지 알 수 있다(참고로 허클베리는 '내가 지옥 가고 말지 뭐' 하며 [[상남자|감싸줬다]]). [[존 브라운]] 같은 노예제 폐지론자에게 종교적 신념이 노예제 폐지론에 영향을 미쳤음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